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성 페미니스트(도서) (문단 편집) === 남성 페미니스트가 해야 할 일들 === 미국의 대표적인 남페미 단체인 NOMAS를 비롯하여, 많은 남페미들은 래윈 코넬(R.Connell)이 에페미니즘(effeminism)이라고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부정과 폐기" 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이라는 생각은 남성성으로부터 모든 젠더 차별과 억압이 유래했다는 [[페미니즘]] 진영의 인식과도 상통하며, 이들이 [[마스큘리즘]] 진영과 선긋기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성권익주의자들은 도리어 현대에 들어서 남성성이 "상처 받았고 무너졌기에"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 그러나 과연 남성성을 버려야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2장의 저자 Hopkins(1998)는 남성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다 버리려 하는 남페미들의 태도는 결국 '''페미니즘의 효율적인 실천 전략들을 줄인다'''고 우려했다. 남성성은 매우 다양하며 복합적이고, 맥락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유해하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본격적인 논의로서, 9장의 저자 Brod(1998)는 남페미들이 남성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남성권력을 해체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요컨대, 자학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남성들의 경험과 고충, 상처들에 대해 남페미들이 귀를 기울이고 위로해야 하며, 그들의 삶에 대해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남페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합하고 신념에 맞게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제안들이 나와 있다. 우선 4장의 저자 Pronger(1998)는 [[질 들뢰즈]](G.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Guattari)의 논리를 바탕으로, 전통적 남성의 두 가지 욕망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공간 확장, 정복, 지배를 표상하는 [[발기]]된 페니스의 욕망''', 다른 하나는 '''공간 폐쇄, 보호, 응축을 표상하는 꽉 닫힌 [[항문]]의 욕망'''이라고 한다. 전자는 타인의 영토를 빼앗아서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후자는 그렇게 얻은 영토를 타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많은 남성들이 어째서 [[호모포비아]]적으로 게이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지를 상징적 수준에서 보여준다. 리오 버사니(L.Bersani)에 따르면, "[[직장]](直腸)이란 남성 권력의 무덤이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4장의 저자는, 많은 남페미들이 전자의 욕망, 즉 발기된 페니스로 대변되는 공격성과 지배성, 압제의 욕망은 잘 인식하고 어떻게든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후자의 욕망, 즉 꽉 닫힌 항문처럼 자신의 것을 양보하지 않고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고함의 욕망만큼은 '''잘 인식하지도 못하고 버리려 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한다. 전자의 욕망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물론 그들의 폭력성은 감소할 것이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의 욕망에도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는 거야|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면 항문성교도 한번쯤 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위의 논리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수준이라는 걸 감안해 보면, 어째서 많은 남성들이 거래, 협상, 경쟁, 스포츠, 게임, 논쟁에 있어서 그렇게나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지지 않으려 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남페미들은 '항문을 열어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개방하고, 더 많이 타협하고 양보하며, 더 많이 나누고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유연한 삶의 양식을 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페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남성 폭력성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한 축이 된다는 것. 5장에서 저자 Schmitt(1998)는 [[동성사회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을 제시한다. 많은 남성들은 동성끼리는 어느 정도 이상 친밀하고 끈끈한 우애를 나누기를 꺼리며, 마초적인 성격일수록 "시커먼 남자놈들끼리 무슨..." 하면서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꼬셔 보기 위해', 혹은 '잘하면 모텔도 함께 갈 수 있을까 해서' 접근하곤 하는데, 남페미들은 이런 경향에 대해 분명히 문제시하고 있고 경계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저자는 '''남페미들조차 동성의 친구들과 우애를 다지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조차 다른 남성들에게는 얕고 무심한 수준의 [[우정]]만을 나눈다는 것이다. 5장의 저자는 흔히 "남자들은 감정 표현을 못 해서 그렇다" 는 통념이 퍼져 있는 것에 반대하며, 그 대신에 남성들이 남성 간 경쟁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반복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강인함과 독립성의 덕목에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남성들은 독립적이고 자립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남성들이 표면적으로 위장하는 것이며, 이들은 [[젠더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실제 의존성과 나약함을 더 잘 감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남페미들은 거짓된 남성성의 허상에 공모하지 않기 위하여, 깊은 우애와 유대를 나누는 대상을 '''남성으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성들의 우정에는 많은 대화와 경청, 관심, 조화, 감정적 동조가 강하게 나타나며, 남페미들은 여성들에게서 이런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 Schmitt(1998)는 남성들이 대부분 이런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 사회화의 결과인데, 소녀들이 서로의 문제로 인해 울고 웃으며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익히는 동안, 소년들은 친구를 짓궂게 놀린다거나, 서로 장난감 칼싸움이나 주먹다짐을 하며 우정을 확인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 Schmitt(1998)는 적어도 남페미들만큼은 남페미로서 이와 같은 '긴밀한 관계' 를 형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따라서 남페미들은 동료가 힘들어하고 있으면 한번 꼬옥 안아주는 것도 좋겠다(?).-- 다음으로, 7장의 저자 Wartenberg(1998)는 철학 교수로서 자신이 겪었던 [[프로불편러|"불편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옛날에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후 자신의 전문분야를 [[임마누엘 칸트]] 및 19세기 독일 철학으로 정했는데, 그 사이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오랜만에 다시 그리스 철학을 (이번에는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며 그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철학적 업적 이면에 여성에 대한 온갖 불평불만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들의 업적 자체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어쨌든 이들을 강의해야 했지만, 문제는 저자가 몸담은 학교가 바로 [[여대]]였다는 것. 이 문제로 고심하던 Wartenberg(1998)는 남페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철학 교수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섣불리 이들 철학자들의 [[혐오발언]]에 대해서 쉬쉬하고 넘긴다거나,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강의 몇 시간을 넘길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독해하는 법 자체를 가르쳐주자'''는 것.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무언가가 남페미들에게 PC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접하는 것을 무작정 막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명하게 통찰하고 잘 받아들이는 방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 그 텍스트의 가치를 수용하면서도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조언들을 자신의 삶에서 잘 실천한다면 남페미들은 어디 내놓아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페미니스트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불행히도 본서의 몇몇 저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서 비관한다. 남페미들은 다른 페미니스트들에 비하여 '''남성이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10장의 저자 Kahane(1998)의 메시지를 살펴보자. 우선 저자는 현실적으로, 남페미들의 상당수가 페미니즘 사상가들과 그 이론들을 머리로는 줄줄 읊으면서도 그걸 '''자기 삶에 녹여내고 실천할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조차도 없다. 남성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강자라는 입장이 우리 사회의 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장의 저자는 그런 실천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국 남성이기에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네 가지 남페미의 유형'''을 정리한다. 이론에만 빠삭하고 뼈를 깎는 실천은 하지 않는 '''허식가'''(poseur) 유형,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여 찬사를 받지만 이를 통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젠더적 관심도 없는 '''내부자'''(insider) 유형,[*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의 권력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유명 정치인들 중 일부가 여성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저도 사실은 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가부장제가 남녀 모두에게 불리하다고 말하면서 남성성의 개혁을 주장하지만 여성들의 고통에는 오히려 무관심한 '''인본주의자'''(humanist) 유형,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늘 채찍질을 하며 탈출구 없는 젠더억압의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자기학대자'''(self-flagellator) 유형이 그것.[* 이런 사람들은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검열하며, 자신이 또 다시 여성을 억압했다며 끝없이 괴로워한다. 얼핏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 같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생산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체화하는 것 역시 지속 불가능하다.] 보다시피 '''네 가지 유형 모두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 상황에서 저자는 오히려, "차라리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낫겠다" 고 제안한다. 즉, 개인은 어차피 윤리적으로 복합적이고 불완전하기에, 남페미들은 그저 자기성찰을 유지하며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고서 '되다 만 페미니스트' 처럼 살아가는 게 최선일 거라는 얘기다. Kahane(1998)은 남페미들에게 이를 위해서 '''상호비판적, 반권위적, 헌신적인 자세로 페미니즘을 경험하라'''고 제안한다. 위에서도 잠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남페미는 아버지의 양육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에도 언뜻 일반 남성들보다도 불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11장의 저자 Gardiner(1998)는 에드워드 크룩(E.Kruk)의 보고를 인용하여,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버지들이 권위주의적이고 돈만 벌어다 주는 전통적 아버지들에 비하여 '''[[이혼]] 상황에서 [[멘탈붕괴]]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자녀와의 유대가 끊겨 버렸다는 느낌, 자녀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도 크지만, 그와 함께 자신이 또 '못난 남성의 모습' 을 보였다는 도덕적 자책으로 인해, 이들은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하지만 저자가 위로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권위주의적 아버지에 비하면 차라리 이것이 낫다는 것이다. 전통적 아버지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녀와 애착 관계라는 사실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겉보기에만 이혼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